조언 칼럼은 모두 같은 말을 합니다. ‘음’을 없애라. 그런데 그 ‘음’이 애초에 거기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는 거의 아무도 설명하지 않습니다. 나머지 말을 망가뜨리지 않고 그것을 덜어낼 수 있느냐는 바로 거기에 달려 있습니다.
쓰레기가 아니라 신호다
허버트 클라크와 진 폭스 트리는 ‘어’와 ‘음’이 낱말처럼 행동한다고 주장했습니다. 화자는 청자가 읽어낼 만큼 의도적으로 그것을 내며, 거기에는 분명한 전갈이 실립니다 — 곧 지연이 온다는 것.
그들의 설명에서 둘은 서로 바꿔 쓸 수 없습니다. 짧은 쪽은 대개 짧은 지연을, 긴 쪽은 더 긴 기다림을 예고합니다. 청자는 그것을 운전자가 방향지시등을 쓰듯 씁니다. 소음이 아니라,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정보로.
그래서 어느 언어에나 제 모양의 군말이 있습니다. 한국어의 흠도, 영어의 흠도 아닙니다. 머리가 다른 사람 앞에서 문장을 실시간으로 조립할 때 인간의 말이 하는 일입니다.
청자는 그것으로 무엇을 하는가
군말은 말할 차례를 넘기지 않은 채 궁리할 시간을 삽니다. 거래는 그게 전부입니다. ‘아직 내 차례고, 이어집니다’라고 알리면 상대는 시작하는 대신 기다립니다.
작은 머뭇거림이 주의를 무디게 하기보다 오히려 벼린다는 단서도 있습니다. 바로 뒤에 오는 말이 조금 더 잘 남는데, 아마 머뭇거림이 다음 낱말을 ‘품이 드는 말’로, 따라서 주목할 만한 말로 표시하기 때문일 것입니다.
그러니 조언의 정직한 형태는 ‘군말은 나쁘다’가 아닙니다. 군말에는 일이 있고, 어떤 빈도를 넘어서면 그 일을 못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.
언제부터 비싸지는가
전환점은 군말이 진짜 지연을 표시하기를 멈추고 문장 조각 사이마다 놓이는 이음매가 될 때입니다. 그때부터는 아무것도 실어 나르지 않습니다. 머리가 따라오는 동안 입이 내는 소리일 뿐입니다.
청자가 알아채는 것은 밀도이지 유무가 아닙니다. 한 문단에 ‘음’ 하나는 보이지 않습니다. 한 문장에 여섯 개면, 그 문장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그것뿐입니다.
그리고 가장 비싸지는 곳은 사람이 가장 신경 쓰는 자리입니다. 발표, 면접, 본론을 두고 벌이는 논쟁. 군말이 말을 알아듣기 어렵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— 보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— 내용에 대한 자신 없음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. 당신을 믿을지 정하는 사람은 가진 것으로 판단합니다.
‘그냥 안 하면 된다’가 안 되는 이유
군말은 결심이 아닙니다. 말하는 속도와 궁리하는 속도 사이의 틈에 댄 헝겊이고, 헝겊을 금지한다고 틈이 메워지지는 않습니다.
그래서 ‘음’을 성공적으로 누른 사람에게는 흔히 더 나쁜 것이 나옵니다. 늘어지는 모음, 반복되는 낱말, 삼켜 버린 문장 끝, 숨도 쉬지 않는 초조한 속사포. 압력은 어딘가로 가야 합니다.
겨눌 것은 틈 자체입니다. 문장의 앞머리를 늦추면 군말이 채울 것이 없어집니다.
대신 할 일
지우지 말고 바꾸십시오. 군말의 직접적인 대체물은 말없는 멈춤입니다. 길이도 같고 하는 일도 같지만, 망설임이 아니라 침착함으로 읽힙니다. 처음에는 우스꽝스럽게 느껴집니다. 화자에게 멈춤은 늘 객석보다 세 배 길게 느껴지니까요.
문장을 더 천천히 시작하십시오. 군말 대부분은 첫 두세 낱말에 몰립니다. 문장이 가장 덜 짜인 자리입니다. 일부러 느리게 시작하는 것이 군말이 사던 바로 그 시간을 사 줍니다.
그리고 판단하기 전에 재십시오. 사람들은 자기 빈도를 양쪽으로 잘못 짚습니다. 어떤 이는 ‘음’을 입에 달고 산다고 확신하지만 그렇지 않고, 어떤 이는 짐작조차 못 합니다. 녹음 한 번, 또는 말하는 동안 도는 계수기 하나면 하루 만에 정리되고, 느낌 대신 한 달 뒤에 견줄 숫자가 남습니다.